Basic Art Series - Claude Monet

클로드 모네 (1840 - 1926)

  • 외광파

살롱에서 성공하다

주제를 발견하다

일요일 오후 같은 세상

  • 라 그르누예르, La Grenouillere, 1880-1890, 안토니 몰른
  • 아르장퇴유의 레가타, Regatta at Argenteuil, 1872
  • 트루빌의 호텔 데 로셰 누아르, Hotel des Roches Noires, Trouville, 1870
  • 라 그르누예르, La Grenouillere, 미란다 - 그루누예르는 개구리연못이라는 뜻이다. 행락장소. 도시를 뛰쳐나온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 또 돈을 받고 함께 놀아주는 여성들을 그르누유라고 불렀다.
  • 라 그르누예르, La Grenouillere, 1869, 우귀스트 르누아르 - 모네는 그림에 수평으로 정확하게 선을 긋고, 절제된 듯하면서도 힘찬 흰색으로 하이라이트를 주었다. 그의 붓질에서 힘이 느껴지는 데 비해, 르누아르의 그림은 경쾌하면서도 여린 면이 있다. 모네가 몇 안되는 색으로 비교적 차가운 색조를 표현한 데 반해, 르누아르의 팔레트는 더 옅고, 붉은 색조를 섞어 따뜻하게 느껴진다. 모네는 패션에 관심을 두지 않았으며, 인물도 몇 번의 거친 붓질로 처리했다. 르누아르는 햇살을 받은 옷이나 유행하는 자잘한 소품에까지 눈을 돌리고 있다. 르누아르가 중심에 초점을 맞춘 구도로 친밀한 관계의 아늑함에 중점을 둔 반면, 모네는 그림자를 고루 분배하고 가장자리에 흰빛을 단호하게 그려넣어 초점을 분산시켰다. 대신 화면 전체를 넓게 가로지르는 구도로 다이내믹한 느낌을 살리면서 화면의 넓이와 공간적 깊이를 조화시켰다. 이처럼 긴장감을 주변으로 분산시키는 것은 모네의 구도적 특징이다.
  • 라 그르누예르, La Grenouillere, 1869 - ‘화분’ 혹은 ‘까망베르’라는 별명이 있는 나무 하나가 있는 작고 동그란 섬.
  • 잔담의 항구, The Port of Zaandam, 1871
  • 해안으로 다가가는 요트, Yacht Approaching the Coast, 1838-1840, 윌리엄 터너
  • 인상, 해돋이, Impression, Sun Rising, 1873 - 르아브르의 항구의 아침 풍경, 비평가 루이 르루아는 조롱하는 어조로 인상주의라고 불렀다. “인상이라고! 나도 확실히 그렇게 생각했다. 나 역시 인상을 받았으니까. 요컨대 인상이 그러져 있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어딘지 방자하고, 어딘지 미적지근하다. 붓질에 자유와 편안함이라니! 미숙한 벽지조차도 이 해안 그림보다는 더 완성적일 것이다.” 호의적 비평가 “만약 그들의 의도를 한마디로 묘사하려 한다면, 인상주의라는 신조어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그들은 풍경을 그대로 재생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얻은 인상을 그려내려 한다는 의미에서 인상주의이다.”
  • 카퓌신 대로, Boulevard des Capucines, 1873 - 넓은 가로수 길을 끊임없이 지나다니는 행인들의 모습을 안개와 빛의 인상으로 묘사하여, 감상자는 세부가 아닌 작품 전체에 시선을 둔다. 비평가 루이 르루아 “내가 카퓌신 대로를 거닐고 있으면 저렇게 보인다는 거요? 놀라워! 당신 지금 놀리는 건가!”

아르장퇴유의 다리

베퇴유의 겨울

집중과 반복, 연작의 시대

다른 지역 그리고 다른 빛

지베르니의 정원

클로드 모네의 연보

~ 20세

  • 1840 클로드 오스카 모네, 잡화상을 경영하는 집안의 둘째 아들로 파리 뤼 라피트 45번지에서 11월 14일 태어남
  • 1845 사업이 잘 되지 않자, 아버지는 자형인 르카드르의 사업에 합류하기 위해 가족을 데리고 르아브르로 이사함
  • 1855 학교의 교사들을 그린 캐리커처로 그림 그리는 재능을 드러냄.
  • 1858 풍경화가 외젠 부댕(1824-1898)을 만나 그와 함께 야외에서 그림을 그림.
  • 1859 그림을 공부하러 파리로 떠남. 살롱을 방문하고 스위스 아카데미에 입학함. 여기서 카미유 피사로(1830-1903)를 만남.

~ 30세

  • 1860 소집령을 받아 알제리의 ‘아프리카 기병대’에 지원했으나, 다음해에 건강 악화로 집에 돌아옴.
  • 1862 노르망디에서 휴가 중 요한 바르톨트 용킨트(1819-1891)를 만남. 건강이 잠시 회복되지 가족들은 돈을 써서 군대에서 그를 빼냄. 11월에 파리로 돌아와 샤를 글레르(1806-1874)의 작업실에 들어감. 그곳에서 르누아르(1841-1919), 시슬레(1839-1899), 그리고 프레데리크 바지유(1841-1870)를 만남.
  • 1863 새로운 친구들과 퐁텐블로 숲에서 그림을 그림. 연말에 글레르 작업실을 모두 그만둠.
  • 1865 바다 그림 두 점을 살롱에서 전시함. 다음 살롱에 출품하기 위해 대형 ‘풀밭 위의 점심’을 그릴 계획을 세우고 퐁텐블로 숲에서 즉시 작업에 들어감.
  • 1866 ‘녹색 옷의 여인’이 살롱에서 전시되어 좋은 평가를 받음. 여름과 가을을 가족과 함께 생타드레스와 옹플뢰르에서 보냄.
  • 1867 부모님과 함께 여름을 보내고 있을 때, 아내 카미유가 파리에서 첫 아들 장을 낳음. 파리로 돌아와 바지유의 작업실을 함께 씀. 바지유가 살롱에서 거부당한 모네의 ‘정원의 여인들’을 할부로 삼.
  • 1868 재정적으로 곤란이 계속되자, 에트르타와 페캉으로 옮겨 작품을 제작함. 1864년부터 모네를 지원해온 선박 주인 고디베르가 저당잡혀 있던 모네의 그림을 되사주고, 작품을 주문함.

~ 40세

  • 1870 작품이 또 살롱에서 거부당함. 6월 26일, 카미유 동시외와 결혼, 한 달 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발발. 런던으로 망명하여, 그곳에서 바지유가 11월에 죽었다는 소식을 들음. 런던에서 화상인 뒤랑 뤼엘을 만남.
  • 1871 1월 17일,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변변치 않은 유산을 상속받음. 가을에 네덜란드를 거쳐 프랑스로 돌아와 아르장퇴유에서 정원이 딸린 집을 세냄.
  • 1872 뒤랑 뤼엘이 많은 작품을 삼. 배를 개조해서 만든 수상 작업실에서 센 강변을 그림. 르아브르에서 ‘인상, 해돋이’를 그림. 여름에 네덜란드를 다시 방문함.
  • 1873 아르장퇴유에서 작업을 하던 중, 귀스타브 카유보트(1848-1894)를 만남. 단체전을 열기 위해, 12월에 ‘무명의 화가 및 조각가, 판화가 협회’를 설립함. 그들이 이후 ‘인상주의 화가’들의 중핵이 됨.
  • 1874 첫 단체전이 파리의 카퓌신 대로에 있는 사진작가 나다르의 작업실에서 열림. 비평가 르루아는 모네가 출품한 ‘인상, 해돋이’라는 제목을 들어 ‘인상주의 전시회’라는 제목으로 논설을 발표하여, 그림을 완성하는 것이 아니라 인상만 그리는 화가들이라고 조롱함. 전시는 대실패였고, ‘무명협회’는 그해 말에 해산.
  • 1875 또 다시 경제적 곤궁에 처하여 작은 집으로 이사함.
  • 1876 뒤랑 뤼엘의 화랑에서 열린 제 2회 인상주의 전시에 18점을 출품함. 백화점 경영자인 에르네스트 오슈데를 알게 되고, 그가 몽주론에 있는 자신의 별장 샤토 드 로텐부르의 홀벽화를 의뢰함. 연말부터 다음해에 걸쳐 ‘생라자르역’을 그림.
  • 1878 파리에서 둘째 아들 미셸 탄생. 여름에 가족들과 베퇴유에 있는 작은 집으로 이사감. 이곳에서 알리스 오슈데와 그녀의 여섯 아이들이 함께 삶. 경제적인 문제는 계속됨.
  • 1879 카유보트가 네 번째 단체전에 자금을 제공함. 베퇴유와 라바쿠르에서 그림을 그림. 9월 5일 카미유 32세 나이로 사망.

~ 50세

  • 1881 뒤랑 뤼엘은 다시 모네의 작품을 사들이고, 모네가 여행을 할 수 있도록 비용을 대줌. 12월에 알리스 오슈데와 그 아이들과 함께 푸아시로 이사함.
  • 1883 뒤랑 뤼엘이 모네의 개인전을 열어줌. 평가는 좋았지만 작품을 많이 팔지 못함. 뒤랑 뤼엘은 자신의 파리 저택에 쓸 장식화를 의뢰함. 지베르니에 집을 얻고, 12월에 르누아르와 함께 남프랑스를 여행함.
  • 1884 1월부터 4월까지 리비에라에서 작품제작.
  • 1886 네덜란드 다시 방문. 가을에 에트르타와 브르타뉴에서 작업함. 여기서 나중에 모네의 전기를 쓰게 되는 귀스타브 제프루아를 만남.
  • 1887 뒤랑 뤼엘이 뉴욕에 화랑을 열고 모네의 작품을 전시함. 1885년부터 모네의 작품을 전시해온 파리의 조르주 프티에서 대성공을 이룸.
  • 1888 1월부터 4월까지 코트다쥐르에서 작업하고 여름에 런던을 다시 방문함. 프랑스로 돌아온 후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거부함. ‘건초더미’ 연작을 시작함.
  • 1889 조르주 프티에서 열린 로댕(1840-1917)과의 합동 전시회가 크게 성공함. 마네의 부인에게서 ‘올랭피아’를 사서 루브르 박물관에 기증하기 위해 기금 운동을 벌임.

~ 60세

  • 1890 ‘건초더미’ 연작 작업을 하면서 ‘포플러’ 연작을 시작함. 1883년부터 살아온 지베르니의 집을 구매함.
  • 1891 뒤랑 뤼엘의 화랑에서 열린 ‘건초더미’ 연작 전시회가 대성공을 거둠. 12월에 런던에서 작업 활동을 함.
  • 1892 봄에 ‘루앙 대성당’ 작업을 함. 1년 전 에르네스트 오슈데가 죽은 후, 알리스 오슈데와 7월에 결혼함.
  • 1895 노르웨이에 있는 의붓아들을 방문함. 3월에 뒤랑 뤼엘은 ‘루앙 대성당’ 연작을 전시함.
  • 1896 다시 노르망디의 바랑주빌, 디에프 그리고 푸르빌 등에서 작업함. ‘센 강의 아침’ 연작을 시작 함.
  • 1897 1월부터 3월까지 푸르빌에서 작업함. 지베르니에 두 번째 작업실을 지음. 여름에 장남이 의붓딸 블랑슈 오슈데와 결혼함. 제 2회 베네치아 비엔날레에 모네의 작품 20점이 출전함.
  • 1899 지베르니의 연못이 있는 정원에서 ‘수련’ 연작을 그리기 시작함. 가을에 런던을 방문하여 다시 템스 강 풍경에 몰두 함.

~ 70세

  • 1900 런던을 몇 차례 방문함. 봄에 지베르니에서, 여름에는 베퇴유에서 작업함.
  • 1903 작업실에서 템스 강 풍경화를 제작함. (1905년까지). 11월 12일 피사로 사망.
  • 1904 가을에 벨라스케스 등 스페인 거장을 연구하러 알리스와 함께 자동차로 마드리드에 감.
  • 1906 수련 연작을 계속했으나 만족스럽지 않았고, 뒤랑 뤼엘 화랑에서 열리기로 계획되어 있었던 개인전이 몇 번이나 연기됨. 10월 22일 세잔 사망.
  • 1908 시력을 잃고 있다는 징후를 처음 발견함. 9월부터 12월까지 알리스와 함께 베네치아를 여행함.

~ 80세

  • 1911 5월 19일 알리스 모네 사망.
  • 1912 베른하임 죈 화랑에서 베네치아에서 그린 작품을 전시하여 대성공을 거둠. 시력이 더 나빠져 안과 의사가 백내장 진단을 내림.
  • 1914 클레망소와 다른 친구들이 수련 연작을 국가에 기부할 것을 제안함. 장남 장 사망. 장의 미망인인 블랑슈가 지베르니의 살림을 맡음. 8월 3일 프랑스가 제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함.
  • 1915 수련 대벽화 작업을 수행하기 위해 세번째 작업실을 지음.
  • 1918 11월 11일, 제1차 세계대전의 종결을 기념하여 국가에 수련 작품 8점을 기증함.
  • 1919 12월 17일, 파리 시절의 오랜 친구들 중 가장 마지막으로 르누아르 사망.

~ 90세

  • 1921 뒤랑 뤼엘의 화랑에서 대회고전이 열림. 시력이 더 나빠지자 우을증과 절망에 빠져 국가에 기증하려던 것을 철회하려고 함.
  • 1922 처음부터 이 프로젝트를 추진해온 클레망소의 간곡한 부탁으로 공식 기증서약서에 서명함.
  • 1923 두 번의 눈수술로 시력을 회복. 그림을 다시 그리기 시작함. 잦은 우울증과 절망에도 수련 대벽화 제작에 열중함.
  • 1926 12월 6일 클로드 모네, 지베르니에서 사망.